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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종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이제는 진부한 것으로 생각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참혹함에서 살아가고 있다. 실로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비중이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 문명이 발생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는 사실은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특히 고대 이집트 문명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주목해 볼 만하다.

  이집트종교는 고대 이집트인의 생활에서 거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정도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예술은 종교적 상징의 표현이 대부분일 정도다. 문학과 철학은 종교적 가르침으로 채워졌고, 고 왕국의 통치 형태는 신전 정치였으며, 심지어 제국 시대의 군사적 파라오 들 조차도 신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공헌할 정도였다. 이집트의 물적 자원은  그 상당량이 정교한 무덤을 만들고, 사제들을 지원하는데, 소모되었다.

  이처럼 이집트 종교가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고대 이집트 문명을 이해하는 데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집트 종교의 특징과 고대 종교에 대한 자료

   먼저 이집트 고대 종교는 복잡성과 다양성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 이는 이집트인이 새로운 종교적인 사상이 발생하거나 들어왔을 때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채택하기  보다는 기존의 것과 융합시키거나 혹은 병존시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받아들여진 새 종교와 사상은 수세기에 걸쳐 종교적인 믿음으로 성장해서 다양한 신(God, Deity)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신들은 천체, 식물, 동물 등 인간의 삶과 연관된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집트 고대 종교에 대한 자료들은 대부분 주술, 주문, 찬송 형태로 되어있는 종교 서적과, 무덤이나 신전의 벽, 석관, 비석, 석상 그리고 파피루스(papyrus) 등에 기록된 종교 텍스트로부터 얻을 수 있다.

  초기에 쓰여진 종교 텍스트(일종의 경전)는 피라미드 내부에 있는, 5, 6 왕조(BC 2494-2181)의 통치자들의 무덤 내실 벽에 쓰여진 이른바 '피라미드 텍스트(Pyramid Text)'이다. 중 왕국 시대(BC 2055-1650)의 텍스트는 무덤 구조물에서 관으로 바뀌었고, '관 텍스트(Coffin Text)'라고 불리 운다. 신 왕국 시대(BC 1550-1069)에는 '사자(死者)의 서'(Book of the Dead)로 알려진 책 형태로 바뀌었다. 사자의 서는 관속에 시신과 함께 매장되는 파피루스 두루마기로 190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자의 서 외에도 다양한 '서(書)'들이 존재하는데 '암-두아트(Am-duat)', '문의 서(Book of the Gate)', '낮과 밤의 서(Book of the day and night)'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텍스트들은 대부분 사자의 사후 여정에 반드시 필요한 주문과 내세에서의 안녕(安寧)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고대 이집트인에게는 다양한 성격과 모습의 신들이 매우 많았다. 어떤 신은 신화에 정의  되어 있으며, 어떤 신은 지리적 위치 따라 혹은 그룹의 특성에 따라 설명되어 진다.

 
2. 초기의 종교 발전 

  고대 이집트의 종교는 여러 단계를 거쳤다. 소박한 다신교에서 유일신교의 초기 형태로 발전하다가, 다시 다신교로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각 도시나 지역이 제각기 지방 신을 섬긴 것으로 보이며,  그 신들은 각 지방의 수호신이거나 또는 자연적 힘을 의인화한  존재들이었다. 이집트의 통일은 영토의 통합뿐 아니라 이러한 여러 신들의 통합까지도 초래했다. 모든 수호신들은 위대한 태양신 "라" 로 통합되었다. 이 신은 중왕국 시대에 테베 왕조의 지배권 장악과 더불어 흔히 "아몬" , 혹은 " 아몬-라" 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 이름은 테베의 최고신 이름에서 온 것이다. 자연의 생장력을 의인화한 신들은  나일 강의 신인 오시리스로 통합되었다. 그 후 우주를 지배하는 이들 두 신, 즉 아몬과 오시리스가 서로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다. 다른 신들도 인정되었지만 나중에 보듯이 그들은 종속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고대 이집트는 많은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지방은 그 지방 주민들에게만 숭배되는 고유의 신과 함께 지역 특유의 전통과 관습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지방 신들은 그 지방의 정치적, 경제적인 비중에 따라 중요성이 결정되었다. 즉 지방이 번성하면 그 지방신은 신(God)으로 승격되고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대표적인 예가 멤피스 지역의 '프타흐(Ptah)'와 지금의 룩소르인 테베 지역의 '아몬(Amon)', 헬리오폴리스의 '라(Ra)' 신 등 이다.

  지역적인 기반을 두지 않고 이집트 전지역에서 숭배되는 신도 있는데,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모든 것, 생무( 生無)의 근원을 품고 있는 원초의 바다로 신화에 묘사되고 있는 '눈(Nun)'신이 그 예이다.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신전 내부에 출입할 수 없었다. 국가적인 축제가 있을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가능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일상생활의 기원에 응답해 주고 가족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신(household deity)들이 있었다. 난장이 '베스(Bes)'와 '타웨르트(Tawert)'는 아이의 출생을 관여하는 신으로 서민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이와 같은 신들은 인간과 같이 행동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즉 신들은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먹고, 감정도 있으며, 때로는 배를 타고 여행을 하기도 하고, 취하도록 과음을 하기도 한다. 신의 모습도 다양했다. 아몬과 프타흐와 같이 인간의 모습을 한 신도 있고, 재칼 모습인 '아누비스(Anubis)', 악어 모습인 '소벡(Sobek)'등과 같이 동물 모습을 한 신들도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사람과 동물을 조합해서 신을 묘사하기도 했는데, 그 예로 독수리 머리를 한 남성 모습의 '호루스(Horus)', 사자 머리를 한 여성신 '세크메트(Sekhmet)' 등이 있었다. 어떤 경우는 한 신이 여러개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이집트인들은 세명의 신, 즉 부모로 상징되는 두 남녀 신과 아이 신을 하나의 무리(가족을 상징)로 묶어서 숭배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오시리스(Osiris)'와 그의 아내, '이시스(Isis)' 아들, 호루스 또는 '아몬-라(Amon-Ra)'신과 아내 '무트(Mut)', 아들 '콘수(Khonsu)'를 들 수 있다.

  신들을 묶는 다른 일반적인 방법으로 상이한 신들을 서로 융합하는 방법(Syncretism)도 사용되었다. 이는 하나의 신이 다른 신의 이름과 특성을 함께 갖게 하는 방법인데, 예로 아몬-라신은 라신의 모습을 한 아몬신이었다.

 
3. 고 왕국 시대의 태양 신앙

   고 왕조 시대는 멤피스가 정치의 중심지였다. 국왕 파라오(Pharaoh)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고, 통치 형태는 전제적 신정정치였다. 4∼5왕조시대는 고 왕조의 전성기로, 이시기에 만들어진 엄청난 규모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절대적 권력을 웅변해 주고 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왕권의 절대화와 피라미드의 건축이었으며, 따라서 고 왕조 시대를 일명 '피라미드 시대'라 부른다. 고 왕조 시대에는 다신교을 숭배하였으나 그 중에서 태양신 라(Re)와 나일강의 신 오시리스(Osiris)를 최고의 신으로 섬겼으며, 영혼불멸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강조되었다. 제6왕조 시대 이후에는 파라오의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 세력이 발호하여 고 왕조는 국가적 통일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처럼 고 왕국 시대에는 라(Re)신 숭배로 구체화된 태양 신앙이 압도적인 신앙 체계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공인된 종교로서 기능했으며, 주된 기능은 국가와 인민들에게 집단적인 불멸성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파라오는 지상에서 이 신앙의 살아 있는 대리인이었으며, 그의 지배를 통해 신의 지배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라 신은 단순한 수호신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그  밖에도 정의, 정직, 진리의 신이자,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는 신이기도 했다. 라 신은 인민 개개인에게 영적 축복이나 물질적 보상을 주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결코 대중을 위한 종교는 아니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오시리스 숭배는 자연 종교로서 출발했다. 오시리스는 식물의 성장과 나일 강이 가져다 주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오시리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자세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집트인의 신앙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아득히 오랜 옛날에 자기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과 그 밖의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쳐 주고 법률을 가져다 준 자비로운 지배자였다. 얼마 후 그는 그의 사악한 동생인 세트의 모반에 의해 살해당했고, 그의 시신은 갈갈이 찢겨졌다. 오시리스의 누이 동생이자 부인인 이시스는 그의 시신 조각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그것들을 다시 한데 모은 다음, 그를 기적적으로 소생시켰다. 부활한 오시리스 신은 그의 왕국을 되찾고 얼마 동안 자비로운 통치를  하다가 , 결국에는 지하 세계로 내려가 죽은 자들의 재판관이 되었다. 그의 유복자인 호루스는 장성하여 세트를 살해함으로써 부친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

  이 전설은 본래 자연 신화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은 나일 강이 가을에 마르고 봄에 홍수가 닥치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시리스의 전설은 좀더 심오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신들과 연관된 인간적 특성들- 오시리스가 그의 신민을 향해 쏟은 아버지와 같은 심려, 그리고 그의 부인과 아들의 충직한 헌신- 은 평범한 이집트인의 정서에 호소력을 갖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신들의 삶 속에 투영된 자신들의 고난과 승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이 개인적 영생의 약속을 전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 신이 죽음과 무덤에 대해 승리를 거둔 만큼 그를 충실하게 따르는 개인들도 영원한 삶을 조장 받을 수 있었다. 끝으로 세트에 대한 호루스의 승리는 악에 대한 선의 궁극적 승리를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4. 이집트인의 내세관

   고대 이집트인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죽음과 장례의식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사후에 대한 이들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애착과 환경에 대한 적응 욕구로부터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내세에서의 이상적인 삶은 현세에서의 삶과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그들은 현세에서의 신분이 내세에서도 변함 없이 계속된다고 믿었다. 현세의 서민이 내세에서 왕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믿음은 갖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훌륭한 왕과 현명한 귀족이 다스리는 이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바람직한 내세의 삶이라고 믿었다. 각 계층마다 사후에 대한 믿음은 그 계층이 현세에서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삶의 모습과 일치했던 것이다.

  또한 바람직한 내세를 얻기 위해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이 변함 없이 유지되고, 육신이 훼손되지 않고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먹을 양식이 계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부패하지 않는 미이라와 사자의 이름과 내세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음식과 생활도구 등을 무덤에 그려 넣었다. 사자는 내세에서 주술로서 그림을 실제 음식 또는 물건으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믿음 때문에 벽화에 생활과 밀접한 장면을 새긴 무덤이 발달하였다.

  이집트인의 내세관은 중 왕국 후기로 들어서면서 원숙하게 발전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간이 지상에 남긴 시신의 소멸을 방지하기 위한 정교한 준비가 행해져야만 했다. 시신이 미라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부자들은 자신들의 미라에 음식물과 기타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남겼다. 그러나 종교가 성숙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소박한 생각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제 죽은 자는 생전의 그의 행실에 대한 심판을 받기 위해 오시리스 앞에 서게 된다고 믿어졌다. 이러한 심판 체계에 포함된 시험을 통과한 모든 죽은 자들은 물질적 기쁨과 소박한 즐거움이 있는 천상으로 들어간다. 백합과 망우수 가우거진 이곳의 늪지대에서 그들은 기러기와 메추리 사냥에 끝없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또는 그들은 맛 좋은 과일이 끊임없이 열리는 동산 한가운데 집을 지을 수도 있다. 그들은 뱃놀이를 할 수 있는 백합의 호수, 목욕을 할 수 있는 연못, 그리고, 노래하는 새와 온갖 온순한 동물이 살고 있는 그늘진 숲을 발견한다. 반면에 그의 심장이 사악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불운한 희생자들은 철저한 파멸을 당한다.

  이처럼 이집트인들은 영혼의 불멸성을 믿었고 사후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 독특한 내세관을 가졌다. 육체는 영생 불사한다고 확신하여 미이라를 만들어 보존하였으며, 이것에는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미이라를 만드는 방법은 우선 사체에서 뇌와 내장을 제거하고, 그 다음 소금, 향료, 수지의 혼합물을 이용하여 사체에 방부  처리를 하고 건조시킨다. 다음에 미이라 속을 채우고 끝으로 아마포로 몇 겹씩 감는다. 이렇게 정교한 기술로 만든 미이라는 피라미드나 그 밖의 분묘 속에 안치하였다. 그들은 죽은 자를 가능한 한 생전의 모습 그대로 완전하게 보존하려 하였으며 침대, 주전자, 보석 등과 같은 생활도구와 함께 매방하였으며, 심지어는 식량도 함께 넣기도 하였다. 다른 여러 민족들도 사후 세계에 대해 더없이 단순하고 진지하게 믿음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미이라가 장구한 세월을 통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방부 처리 기술의 우수성 못지 않게 건조한 사막 기후가 부패를 막아준 것도 큰 원인이 되었다.

 피라미드와 신전은 수많은 노동력을 조직화하여 건축한 전제 왕권의 상징물이었다. 피라미드를 건호한 주된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태양신과 관련된 종교적 열망과 국가 권위의 상징인 것만은 분명하다.

  

5. 중 왕조 시대  윤리적 종교의 등장

   중 왕조 시대는 테베(Thebe)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테베의 수호신은 아몬(Amon)이었는데, 고 왕조 시대의 레신과 합쳐져 아몬-레 신에 대한 신앙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파라오의 지배권은 계속되었지만 지방호족과 귀족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어 일명 '봉건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중 왕조시대의 최대의 번성기는 제12왕조로서 이때에는 대외 무역이 활발해지고 금·은광이 개발되었고, 치수와 관개 시설의 확충으로 이집트 역사의 최고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더불어 이집트의 종교 발전도 중 왕국 말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태양 신앙과 오시리스 숭배는 이 무렵에 두 신앙의 최선의 국면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통합되었다. 살아 있는 자들의 신이며 현세에서 선의 옹호자인 아몬의 직분은, 인간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고   죽은 자를 심판하는 오시리스의 기능과 거의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이제 종교는 명백히 윤리적인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정의를 행하고자 하는 그들의 염원을 거듭해서 고백했는데, 이는 그러한 행위가 위대한 태양신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었다.

  

6. 신 왕조 시대  종교의 타락 

  신왕국 시대는 아모스 1세가 힉소스족을 추출하고 제18왕조를 세우면서 시작되었고,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에게 멸망할 때까지 제26왕조가 지속되었다. 힉소스를 몰아냈던 민족 운동의 영향으로 지방주위와 귀족 세력이 크게 약회되었으며, 힉소스로부터 전수된 전차와 말, 그리고 철제 무기는 그들의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켜,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 이집트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와 같이 이집트의 세력이 주변 국가로 크게 팽창한 신 왕조 시대를 일명 '제국주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제국이 수립되자마자 이집트인의 종교는 심각한 타락을 겪게 되었다. 종교에서 윤리적 중요성은 파괴되고 미신과 주술이 득세했다. 주된 원인은 힉소스인을 몰아내기 위해 오랜 동안 격렬한 전쟁을 치르면서 비합리적인 태도가 몸에 익숙해지고, 그에 따리 지성을 경시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사제들의 세력이 증대되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두려움을 이용했다. 그들은 죽은 자의 심장이 그의 본성을 폭로하지 않게 해 준다는 주술적 부적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제문을 판매했는데,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적힌 이 제문을 무덤에 함께 묻으면 죽은 자들이 천상계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문을 모아 놓은 것이  "사자의 서"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자의 서는 이집트인의 경전으로 인식하지만, 중왕국 이후에는 사자의 부장품, 즉 제문들을 모아 놓은 것일 뿐이다.


7. 아케나톤의 종교혁명

  이집트에서 유일신을 섬기려는 첫시도는 신 왕국 시대에 이루어졌다. '아케나톤(Akhenaten, 혹은 아멘호텝(Amenhotep) 4세, BC 1352-1336)'왕이 유일신으로 '아톤(Aten)'을 섬기는 한편 전통적인 다신교 신앙을 배척하였다. 태양의 빛과 열을 상징하는 아톤신이 이집트인에게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아케나톤 시대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자주 텍스트에 등장했고 표현되었는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주에 대해 언급한 '아톤이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All that Aten encompass)'이다.

  아케나톤왕의 새로운 교의(敎義)는 그의 사후까지 지속되지 않았다. 어린 왕 '투탕카문(Tutankhamun)'의 스승이던 종교 지도자 '아이(Ay)'의 주도 하에 아몬-라신에 대한 전통적인 숭배로 되돌아갔다. 투탕카문의 통치기간 동안 아몬-라신은 이전의 권위를 되찾았고, 고대 이집트 왕조가 멸망할 때 까지 지속되었다.

  이집트 고대 왕조를 통틀어 국가의 최고신은 고 왕국 시대부터 변함 없이 태양신 라였다. 신 왕국 시대에는 테베의 수호신이던 아몬-라신이 국가의 최고신으로 군림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사제들에 의해 종교가 주술적 체계로 전락하자 마침내 거대한 종교 혁명이 초래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신 왕국 시대 제18왕조의 왕인 아멘호텝 4세였다. 그는 가장 극악한 종교 타락을 시정하고자 시도했다가 실패를 맛보자, 그 후로는 아예 그 종교 체계를 절명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사제들을 신전에서 몰아내고, 전통적 신들의 이름을 공공 기념물들에서 삭제해 버렸으며, "아톤" (태양의 옛 명칭)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신을 섬기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멘호텝에서 아케나톤 으로 바꾸고, 또  그의 부인 네페르티티 도 네페르-네프루-아톤 으로 바꾸었다. 아케나톤은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려는 생각에서 수도를 새로 엘- 아마르나 에 건설하고 이 도시를 새로운 신에게 바쳤다. 이러한 물리적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련의 새로운 교리가 개혁 파라오에 의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일정한 한계는 있지만 최초로 유일신교를 가르쳤다. 현존하는 신이라고는 오직 아톤과 아케나톤이 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신들과는 달리, 아톤은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을 갖지 않았으며 생명을 주는 따뜻한 태양 광선으로 간주되었다. 아케나톤은 스스로를 아톤의 후계자이자 공동 통치자라고 생각했다. 파라오와 그의 부인은 아톤 신에게 예배를 드린 반면, 여타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신인 아케나톤에게 예배를 드려야 했다. 아케나톤은 아톤 신이 세계의 도덕적 질서의 창시자이며,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상을 베푸는 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이집트 종교의 윤리성을 회복시켰다. 그는 새로운 신을 인간성에 유익한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 그리고, 그의 모든 피조물을 자비로운 눈길로 굽어보는 하늘의 아버지로 묘사했다. 이러한 신의 일관성, 정직, 자비 등의 개념은 그로부터 600여 년 후 히브리의 예언자들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등장했다.

  또한, 아멘호텝 4세의 일신교 사상은 유대교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제19왕조 시대에는 유대민족의 '출애굽(Exodus) 사건이 있었으며, 마침내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 2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어 페르시아 제국의 일개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파라오의 제국 이집트는 사라졌지만 이집트의 화려한 문화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이룩딘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그리스 문화와 통합되어 세계 문명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8. 파라오 시대 이후의 종교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한 동안은 세라피스신(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아피스신과 그리스의 제우스, 헬리오스, 하데스, 아스클레피오스, 디오니소스 신을 섞어 세운 합성신)과 이시스 신을 중심으로 하는 이집트 고대 종교와 그리스. 로마의 신앙이 혼합된 듯한 종교가 퍼져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이집트인들의 유일신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이전에도 이집트 내에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나 이는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 사회에 국한된 것이었다. AD 40년경(로마제국 네로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성 마가(St, Mark)에 의해 이집트에 기독교가 전래되어 로마제국의 견제와 박해 속에, 서서히 성장해 나갔다. 그 후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에 따라 콥트교(이집트의 기독교)가 전국적으로 전파되었지만 451년의 칼케돈 공회의(예수의 본성에 관해 로마교단과 일부 동방교회간의 논쟁- 삼위일체론과  단성론- 에서 단성론자측이 패배함. 단성론은 콥트, 아르메니아 정교의 교리)에서 콥트교가 이단이라는 판결 받은 후, 독자적인 교황을 세워서 독립의 길을 걸었다.

  7세기에 이슬람의 기치를 든 아랍군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이슬람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9. 우주 기원에 대한 이집트인의 개념 

  우주에 대한 고대 이집트인의 시각은 우주 발생 이전의 혼돈 상태로부터 신과 인간의 세계가 동시에 창조되어 함께 존재하였고, 천지 창조는 어떤 시원이 우주(또는 세상)를 만드는 무한히 다른 형태로 분열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세 가지 주요 창조신화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헬리오폴리스 지역의 종교와 연관이 있는데, 이 신화에 따르면 스스로 창조되어진 라가 자위행위(Masturbation)로 한 쌍의 남성신(슈, Shu, 공기의 신)과 여성신(테프누트, Tefnut, 습기의 신)을 창조하였고, 이렇게 창조된 두 남녀신이 다른 쌍 (게브, Geb, 땅의 신과 누트, Nut, 하늘의 신)을 만들고, 이 쌍이 다른 쌍을 만드는 식으로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① 우주로서의 신전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신전은 신이 사는 집으로 여겨졌고, 우주가 창조되는 순간의 세상을 묘사하는 작은 모형물이었다. 즉 신전을 창조의 중심지로 생각한 것이다. 신전에 대한 이러한 상징성은 신전의 위치와 모양, 신전 내부의 벽과 천정 장식에 잘 나타났다.

  우선 신전의 구조는 대량의 진흙 벽돌로 담을 만들어 신전을 둘러싸고 외부세계로부터 차단시킨 형태이다. 이는 우주 창조 순간의 물의 세계를 상징하고, 신전은 그 물 속에 떠 있는 하나의 섬(淸淨의 세계, 질서의 세계)으로 생각하였다. 진흙 담 안에 신전 내부로 들어가는 벽과 탑문을 만들고 통치자(왕)들이 이집트의 적들을 참살하는 장면(혼돈의 세계가 극복되고 질서의 세계가 이루어짐을 상징한다.)들로 장식하였다. 신전 입구에는 네개의 큰 기둥과 파일론(Pylon, 고대 이집트 사원의 탑문)을 세웠다. 파일론은 상형문자로도 장식되었는데 이는 신전에서 가장 큰 구조물 가운데 하나였다.

  신전은 항상 나일강의 동편, 무덤과 장제전은 서편에 위치했다. 즉 신전 축은 남북으로 흐르는 나일강과 수직이 되도록 동서 방향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해가 파일론 입구 위로 떠오르고, 그 빛이 창조의 언덕을 상징하는 신전내의 지성소(Scactuary) 안으로 혹은 신들이 사는 방(Shrine)으로 비치게 만들었다.

  열주(列柱)홀은 우주를 묘사하는 여러 가지 장식으로 치장하였다. 홀 내에 있는 기둥은 '창조의 늪(파피루스 숲을 상징)'을 상징하고, 천정은 하늘을 나타내도록 장식하였다. 홀 벽에는 우주의 활동이 묘사되어 있다. 그중 신과 왕간의 상호관계는 우주 활동의 핵심이었다.

  어느 신전에나 해당되는 공통된 특징은 해가 신전 바닥에서부터 천정 전까지 떠오르게 해서 신을 점진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신전에서의 의식은 신의 일상 생활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루 세 번 즉 동틀 때, 정오, 밤에 행하는 기본적인 예식은 신전을 닦고, 성별(聖別, 종교의식으로 기름을 붓는 행위를 말함)하고, 신의 옷과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대축제는 신의 사회적 활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한 신이 다른 신을 방문하거나 그의 집(신전)에 초대하는 행위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식의 주체는 항상 왕이어서 실제적으로 대부분 서민들의 종교 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② 의식(儀式)과 축제

  고대 이집트인의 종교사상을 잘 보여주는 것은 신화가 아니라 의식이다. 각 주요 신전에서 왕은 상징적으로 최고의 종교 지도자(神官)로 여겨졌다. 청정식(淸淨式 , 성물을 닦는 행위)과 신에게 옷과 음식을 준비하는 행위가 날마다 행해졌지만, 이런 일상적인 의식에 일반인들은 참가를 할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일반인들은 종교 축제를 제외하고는 신전 안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신전의 의식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각 신전은 축제일을 기록한 달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축제 중 하나는 테베 지역에서 열리는 '오페트(Opet) 축제'로 범람기, 두번째 달에 열렸다. 이 축제에서 아몬신은 카르낙 신전에서부터 룩소르 신전까지 무트와 콘수의 배로 여행하였다. 또 다른 큰 축제는 새해에 열렸는데, 이 또한 신의 방문이다. 즉 단다라(Dandara)의 하토르(Hathor) 여신이 이드푸(Edfu) 신전으로 호루스 신을 방문(일종의 합방, Secret Marriage)하는 것이었다. 하토르 여신의 방문은 단다라부터 이드푸까지 약 180km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이 축제의 내용은 이드푸 신전 벽화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10. 종교혁명의 실패

   종교 혁명에 대한 아케나톤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아톤 종교는 대중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대중은 여전히 과거의 신들에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이다. 새 종교는 그들에게는 너무도 낯설었던 데다가 종전의 종교가 지녔던 매력, 즉 내세에 대한 약속을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아케나톤 이후의 파라오들은 아몬 신의 사제들과 결탁함으로써 과거의 신앙을 회복시켰다. 아케나톤의 계승자로서 "투트왕" 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파라오는 그의 이름을 투탕카톤에서 투탕카멘으로 바꾸었고, 수도도 엘- 아마르나에서 옛 수도인 테베로 다시 천도하면서 과거로의 복귀를 주도했다. 그의 무덤 역시 옛 의식과 사후 세계에 대한 집착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후 이집트 종교에서는 의식주의와 주술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 사제들은 신들을 속여서 구원을 얻도록 해 준다는 제문과 부적을 팔았다. 그 결과 오시리스 숭배마저도 고매한 도덕성을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Ⅲ. 결론

   오리엔트 사회 중 가장 특정 지어지는 하나는  제정일치의 신권정치가 행하여졌다는 것이다. 정치적 지도자는 종교적 지도자였으며, 종교는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관은 신의 지상의 대리자이자 신의 뜻을 전달하는 자로서 사회 생활 전반에 걸친 지도자였다. 국왕은 절대 권력자인 동시에 최고의 제사장으로 신권을 통해 국민 위에 군림하였다. 정치 권력 자들은 궁전과 신전을 중심으로 호사스런 생활을 하였고, 그러한 생활은 현세에서뿐만 아니라 내세의 생활인 분묘에까지 연장되었다.

  또한 오리엔트 사회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며 정체된 사회였다. 민족의 교체와 국가의 흥망성쇠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트 사회의 기본 성격들은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보수적인 정치관이 나타났다. 지배 계급은 현상 유지에 만족하고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였으며, 피지배 계급은 현실 도피적 체념관에 사로잡혀 적극적인 현실 타파나 정치 참여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즉 오리엔트 사회는 통치자의 신성불가침과 절대적 권위가 인정되었으며, 피지배자는 수동적이며 맹목적인 복종만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보수적이며 정체된 사회 속에서 종교는 이집트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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