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그냥 저냥 사는 얘기들~
uzza

공지사항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이집트 역사

2009/08/18 13:44 | Posted by uzza
1.문명의 발생

 

  최초의 문명은 큰 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제일 먼저 문명이 일어난 곳은 서 아시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 유역과 나일 강 유역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늦게 서북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서도 문명이 일어났고, 동북 아시아에서는 황하 유역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4대강 유역에서 문명이 발생한 이유는 인간생활에 유리한 아열대성 기후가 분포하며, 큰 강을 끼고 있어 어로 생활이 가능하였고, 교통도 편리하여 사람이 생활하기에 유리였기 때문이다. 정기적인 강의 범람으로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이 하류로 운반되어 비옥한 옥토가 마련됨으로써, 자연 조건에 지배되는 고대의 농업에 큰 혜택을 주었다. 강의 범람은 인간에게 커다란 시련이 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극복하는 지혜와 능력을 길러주고, 그러는 가운데서 공동 생활과 도시 국가가 발생하는 기반을 마련하여 문명을 발생시켰다.

 

 2. 이집트의 왕조와 역사적 변천 과정

 

이집트 문화는 하안 문화(Riparian Culture)였다. 최초로 정치적인 동맹이 이루어졌을때 나일강 어귀의 삼각주 지역에 북왕국이 생겼고 멤피스와 나일강의 첫 번째 폭포 사이에 남왕국이 생겼다. 이집트의 실제 역사는 이 초기의 두 왕국의 연합과 함께 시작하는데 이 사건은 기원적 2900년경 제 1대 왕조의 메네스왕의 통치 중에 일어났다.

이집트 역사는 대개 왕조중심으로 분류하고 있다. 연대 특히 제일초기 시대의 것들은 너무 부정확하여 수백년이 틀릴 수도 있다.(이론서 마다 이집트 역사가 각기 틀리게 표기되어있음)여기에서 사용한 신왕국까지의 연대와 분류는 독일의 이집트학자인 게오르그 슈타인도르프의 것을 따르기로 하겠다.

 

구왕국(기원전 2900~2270년)은 제 1왕조로부터 제 6왕조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는 문화가 싹틀 전조의 시기이고 문화의 기초적 형태인 종교와 문자와 예술의 특색이 그 성격을 갖추었던 시기이다. 그것은 또한 기제의 피라드를 미건립한 사람들과 체옵스의 체프렌과 이게리누스 같은 대한 왕들이 시대인데 그들은 모두 제 4왕조에 속한다.

 

제 1과도기(기원전 2270~2100년)는 구왕국의 붕괴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것은 봉건제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며 멤피스에 왕의 권위가 형식적으로 남아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제1 중간기는 제 7왕조로부터 제 10왕조까지로 되어있는데 다 합해서 왕이 30명도 넘는다.

 

중기 왕국(기원전 2100~1700년)은 헤라크레오폴리트 왕들을 축출하고 다시 나라를 통일한 테베스의 군주들이 통치했던 발전의 시기를 나타낸다. 이 시대는 제 11왕조로부터 제 13왕조까지를 포함한다. 이 시대를 우리는 문화의 개화기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때 피어난 문화양식은 한명의 아메네메트왕과 세 명의 세소스트리스라는 이름을 지닌 네 명의 군주 밑에서 완성되었던, 수없이 많은 뛰어난 건축물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두번째 과도기(기원전 1700~1500년)는 힉소스왕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힉소스 왕조는 셈족이었는데 그들은 나일의 땅에 침입하여 정복하고 한 세기 동안 지배했다. 그들은 결국 테베스의 왕들에 의해 쫓겨난다.(제 17왕조).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힉소스 왕조가 쫓겨난 것은 성경에 나오는 유태인의 춥애굽의 전설과 관련있다고 가정해왔었다. 지금 이 가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신왕국(기원전 1555~1090)은 정치적으로 위세를 떨친 시대였고 제 18조부터 제 20조에 이르는 "황제 통치주의자"인 파라오들의 시대였다. 토트메스 3세의 정복은 근동과 관계를 맺게 하였다. 외국인들은 이집트에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당했고 엄청난 부가 나일의 땅으로 흘러 들어왔다. 훌륭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아메노피스 3세는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왕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를 계승한 아메노피스4세(네페르티티의 남편)는 위대한 종교개혁자여서 오래된 종교를 태양 숭배의 양식으로 바꾸려 시도했고 그 이유에서 자신을 이크나톤 - '아톤(태양신)이 만족한 사람' - 이라 불렀다. 그는 사막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텔-엘-아마르나라고 불렀는다. 그것은 테베스의 경쟁상대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는 내란들 속에서 와해되었고 왕의 사후까지 지속하지 못했다. 아메노피스의 사위인 투탄카멘의 통치하에서 왕궁은 다시 테베스로 옮겼다.

그렇지만 이집트는 제 19왕조의 왕들 밑에서 그 정치적인 권력이 절정에 달했었다. 후에 람세스 대왕이라 불리는 람세스 2세는 66년의 통치기간 동안 아부심벨, 카르나크, 룩소, 아비도스 그리고 멤피스에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들과 라메세움이라 불리는 테베스에 있는 보시 사원에 자신의 무한한 힘을 그대로 나타냈다. 람세스 사후 무질서가 뒤따랐으나 람세스 3세의 21년 동안 계속된 통치기간엔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 후로는 이집트는 점점 강력해지는 태양신 아멘(아문또는 아몬)의 성직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세번째 과도기(기원전 1090~712년)는 소요와 권력의 변동이 심한 시기였다. 제 21왕조에서 제 24왕조에 이르는 왕들 중에서 세숑크 1세가 솔로몬의 사원에 뛰어들었던 예루살렘의 정복자로서 우리의 흥미를 끈다. 제 24대의 왕조 밑에서 이집트는 잠깐 동안 이디오피아의 지배를 받았다.

 

후기(기원전 712~525년)에는 제 25왕조의 에사라돈왕 치하에서 앗시리아인들에게 이집트가 정복당한 일이 있었다. 제 26왕조는 이디오피아를 잃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나라를 통일할 수 있었다. 그리스와의 동맹은 무역과 교류에 활기를 띠게 하였다. 제 26왕조의 마지막 왕인 프삼틱(프삼테크) 3세는 펠루시움의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배했다. 그 후로는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전 525년에 이미 이집트의 진정한 문화적 역사적 원동력은 다소 진전되었다.

이집트에 대한 페르시아의 지배(기원전 525~332년)는 캄비세스,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를 거쳐 다리우스 2세 하에서 붕괴했다. 이 기간 동안 이집트의 문화는 과거에 의지하여 명백을 이어 왔고 이집트는 '강자들의 전리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기원전 332년~기원후 638년)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정복과 알렉산드리아의 건설로 시작되었는데,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대 도시 풍의 초점이 되었다. 알렉산더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으나 톨레미 3세에 의해 이집트는 다시 정치적인 자치권과 권력을 찾았다. 예수 탄생 이전의 두 세기 동안에는 톨레마 왕조 내에 반목이 많았다. 이집트는 점점 로마의 영향권 내로 끌려 들어갔다. 후기의 로마 황제들 밑에서 이집트는 자치권을 찾은 것 같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로마의 영토이며 로마제국의 곡창이었고 약탈로 철저하게 빈곤해진 식민지였을 뿐이다.

기독교가 아주 일찍이 이집트를 장악했다. 그러나 기원 후 640년 이후로는 아라비아의 칼리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가 후에 터키의 오스만 왕조에 공물로 바쳐졌다. 이집트는 마침내 나폴레옹의 정복에 의해서 복잡한 유럽역사에 휘말려 들어갔다.

 

3. 피라미드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거론할 때 대부분 기자에 있는 세개의 대피라미드를 연상한다. 이들은 이집트의 제4왕조(기원전 2613-2494년)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 피라미드만이 이집트에서 건설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피라미드에 대한 신비를 해석하는데 중요하다. 이집트에는 1백40여개의 대소 피라미드가 건설됐으며, 현재 그 위치가 확인된 것만도 80여개가 된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이집트의 특이한 기후의 산물인 미라와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을 알아야 한다. 고대 초기 이집트에서 사망한 사람을 매장하는 일은 매우 간단했다. 사막 경계 지역에서 시체를 약간 깊은 구덩이에 넣고 모래로 덮었을 뿐이다.

건조한 공기와 더운 모래의 접촉을 받은 시신에서 급속한 탈수 현상이 일어났다. 이때 수의가 썩기 전에 자연적인 방법으로 미라가 만들어지곤 했다. 이집트인들은 우연히 육신이 보존된 미라를 발견하고 내세에서 생을 영위하기 위해 미라처럼 시신이 보존돼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구덩이가 커다란 무덤으로 변하고 관이 사용되자 시신은 모래와 직접 접촉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인공적으로 미라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공들여 미라를 만들어도 끊임없이 불어 닥치는 사막의 바람이 무덤을 파손되고 재칼과 같은 동물이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훼손하곤 했다. 그러므로 무덤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도 동시에 생각해야 했다.

  

 세계의 중심에 위치-세계 대륙을 4등분

 

 피라미드의 대명사는 이집트 쿠프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대피라미드(기원전 2천5백년 추정). 과학자들이 가장 많은 연구를 수행한 피라미드다. 대피라미드 옆에는 쿠프왕의 아들과 손자의 무덤으로 알려진 두 개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있고, 왕비의 무덤이라는 작은 피라미드 6개가 3개씩 2줄로 배치됐다.

이 9개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서남쪽 가까이에 위치한 기자지역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대피라미드의 위치가 여러 면에서 지리학적인 중심이라는 점이다. 먼저 대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수직선(동경 31도)과 수평선(북위 30도)을 그리면 전세계 대륙 면적이 거의 4등분된다. 또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끝부분을 원호로 연결할 때 대피라미드는 원의 중심에 위치한다(그림 2). 이곳은 고대의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피라미드가 세계의 어떤 중심이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현대 기술이 손 든 정밀성-밑변을 높이로 나눈 값은 π/2

 

 대피라미드를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 먼저 대피라미드의 엄청난 규모에 일종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 구조물의 건축학적 정밀성을 확인하고 감탄하기에 이른다.

대피라미드의 네변 길이는 모두 2백30m 정도. 평균 2.5t의 무게와 어른 키만한 돌로 이렇게 길게 받침을 세우려면 아무래도 각 변의 길이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소숫점 첫째 자리에서 값의 차이가 날 뿐 거의 비슷하다. 또 각 밑변이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고 밑변의 각 모서리가 90도를 이루는데, 무시할 정도로 오차가 작다.

현대의 건축학자들은 이런 정밀도를 가진 거대한 건물을 짓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더욱이 밑변 하나의 길이를 높이(1백46.6m)로 나눈 값은 1.57. 원주율(3.1416)의 절반에 해당하는 이 수치까지 고려된다면 피라미드의 건축 과정은 더욱 복잡했을 것이다.

또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장소는 일명 ‘왕의 방’이다. 밑면에서 3분의 1 떨어진 곳에 위치해 면도날을 재생시키고 부패를 막는 등 ‘피라미드 파워’를 일으킨다는 곳이다. 이곳에는 어떤 수치들이 숨겨져 있을까.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왕의 방’의 가로와 세로를 비롯한 여러 가지 건축 구성 비율이1:1.618, 즉 황금비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흔히 황금비는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한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알려졌는데, 이보다 훨씬 이전에 건축된 피라미드에서 나타난 것이다.

 

 지구 크기를 상징한다 - 43200의 비밀

 

 과학자들은 대피라미드에서 측정된 각종 수치들을 여러모로 연관시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대피라미드에 숨겨진 천문학적 수치가 드러났다.

먼저 과학자들은 피라미드가 독특한 단위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재 보편적으로 알려진 1피라미드 단위는 지구의 남북극 거리를 2천만으로 나눈 수다. 이 단위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밑변 하나를 이 단위로 나눈 값은 약 365. 잘 알고 있듯이 이는 1년의 날짜다.

지구의 세차 운동과 연관된 수치도 발견됐다. 지구의 적도 둘레는 약 4만75km, 반지름은 약 6천3백78km. 그런데 이를 ‘4만3천2백’으로 나눠 보니 이상한 값이 나왔다. 먼저 적도둘레를 나누면 약 9백27m가 산출된다. 피라미드 네변의 합과 거의 유사한 값이다. 또 지구 반지름을 나눈 값은 약 1백47m. 피라미드 높이에 거의 일치한다. 피라미드의 둘레와 높이가 지구의 크기를 상징하는 셈이다. 문제는 '4만3천2백’이란 값이 어떻게 산출된 것이냐는 점이다.

이 값은 세차 운동에서 발견되는 특정 값인 ‘4천3백20’을 10배한 수치다. 세차 운동은 지구 축이 약 2만6천년을 주기로 3백60도 회전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한 학자가 지구가 60도를 이동하려면 약 4천3백20년이 걸린다는 점에 주목했다. 마침 4만3천2백을 비롯해 4천3백20, 4백32와 같은 수는 고대 신화에 자주 등장해 학자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4만3천2백’이란 수치를 피라미드 둘레와 높이가 갖는 의미를 해석하는데 사용했다.

 

 고대 이집트인의 독자기술

 

피라미드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비록 현대인들에게 거대한 피라미드에 많은 비밀이 간직돼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에 의해 당시의 기술로만 건설된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논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신석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고대 이집트에서 어떻게 커다란 피라미드들을 건설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피라미드를 만든 공구와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이집트인이 사용한 공구는 단단한 돌덩어리, 나무에 묶는 원형 망치나 도끼류, 날카롭게 갈은 칼과 같은 돌 종류와 동과 같은 금속류로 만든 칼이나 가위다. 구리와 같은 연한 금속의 경우 현재의 합금과 같이 몇가지 불순물을 사용해 강도를 높이는 방법을 알았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지만 연장의 대부분이 단단한 석재였다고 추측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원시적인 공구로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돌항아리의 숫자와 가공 기술을 근거로 특수 기술을 가진 공구가 사용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사용된 돌덩어리의 거의 대부분이 석회암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석회암은 석회물질이 물밑에 쌓여 굳어진 퇴적암으로, 경도가 가장 무른 활석 다음으로 가공하기 쉬운 재료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초보적인 연장으로도 능히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로 재단하거나 가공할 수 있다.

 

 비탈길 타고 돌 운반

 대형 돌들을 채석장에서 절단하는 방법론도 논란거리가 되곤 한다. 그러나 채석장에서 돌을 추출할 때 나무 쐐기를 박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쐐기의 부피가 증가해 간단하게 절단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집트의 채석장에서 수백t의 대형 돌기둥인 오벨리스크가 미완성인 채 발견됐는데, 이곳에 쐐기를 사용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렇다면 대형의 돌은 채석장에서 어떻게 기자 지역으로 옮겨졌을까. 기자의 대피라미드 석재는 기자 지역 외에 2곳의 채석장에서 공급됐다. 피라미드 외벽용으로 사용된 매끄러운 석회석은 기자 지역 근처의 카이로에서 50km 떨어진 투라에서 채석됐다.

그리고 피라미드 내부에 사용된 화강석은 카이로에서 9백km 떨어진 나일강의 첫번째 급류 부근에 있는 아스완에서 가져왔다. 평균 중량 2.5t, 큰 것은 70t이 되는 돌덩어리를 아스완에서 운반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거대한 거룻배로 돌을 운반하고, 항구에서 현장까지 썰매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대피라미드 남쪽에서 발견된 '제1 태양의 배'는 당시 이집트의 건조 능력을 보여준다. 현재 원형이 복원돼 전시되고 있는 이 배는 좌우측에 5명씩, 그리고 배 앞뒤에 1명씩 총 12명의 노젓는 사람에 의해 운행된 것으로 보인다. 배의 규모를 볼 때 총길이 42.3m, 폭 5.6m로서 한번에 약 1백50t의 물건을 운반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피라미드 건설에 대한 가장 큰 논란거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 원하는 높이까지 거대한 돌을 옮겼냐는 것이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비탈길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즉 피라미드 한쪽 옆면에 경사로를 만들고 지레를 설치해 썰매에 얹혀진 돌덩어리를 상부로 끌어당기는 방식이다.

피라미드가 높아질수록 비탈길의 길이가 길어지는데, 이때 비탈길이 주저앉지 않도록 경사각은 항상 거의 10도를 유지했다. 실제로 대피라미드에 대한 근래의 조사에서 이런 증거가 발견됐다.

  

 왕의 은밀한 무덤

 

왕들의 골짜기.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길이 500m, 너비 1㎞인 음산한 골짜기. 이집트 나일강 중류의 룩소르 서쪽에 있는 이 골짜기는 지금으로부터 3천∼4천년 전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왕)들의 무덤이 들어찬 곳이다.

왜 왕들은 이렇듯 도읍지에서 멀리 떨  어진 음산한 골짜기의 벼랑과 바위 틈에 그들의 주검을 숨겼을까. 왕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이 죽은 뒤에 머무를 곳으로 피라미드를 세웠다. 또 영혼이 다시 찾아들도록 자신들의 시체를 썩지 않는 미라로 만들게 했다.

피라미드는 어떤 침략에도 견디게끔 거대하게 만들고, 도둑질 당하지 않도록 입구를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왕들의 뜻과 달리 피라미드의 보물은 도둑들에게 번번이 털렸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비밀장소에 무덤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낸 왕은 토트메스 1세였다. 그는 오랫동안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 끝에 자기 무덤을 이 골짜기의 벼랑 틈에 숨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무덤을 만든 장소를 비밀에 부치고자 잔인한 살육극이 벌어졌다. 왕의 신하는 전쟁포로 100여명을 데리고 무덤을 만든 뒤 그들을 모두 죽였고, 그 또한 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뒤로 모든 파라오의 주검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왕들의 골짜기’에 숨겨졌다. 그리하여 파라오의 미라들은 약 3천년 동안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이집트 왕가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믿었던 이 비밀장소는  안전하지 않았다.

 

 

로제타스톤

 

아주 짧은 유럽 역사와 그보다 조금 앞선 그리스·로마의 역사밖에 모르던 유럽 사람들에게 로마를 수천 년이나 앞선 이집트 문화가 던진 충격은 매우 컸다. 유럽이 아직 원시적인 떠돌이 사냥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집트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이집트의 수천 년 유산 가운데 피라미드 하나만 해도 2t짜리 돌 250만 개로 쌓은 것이다. 유럽인들이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데 한 가지 난처한 문제가 생겼다. 이집트의 유적과 유물을 눈으로 볼 수는 있으되 거기에 담긴 속뜻은 알 수 없었던 까닭이다. 상형문자인 것 같은 이상한 기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무덤 안의 벽화나 탑에는 물론 심지어 잉크 스탠드나 지팡이에까지도. 그런데 그것들을 단 한 가지도 해독할 수 없었다.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의 문화유산을 뻔히 보면서 수백 명에 이르는 왕의 이름 하나도 알 수 없다니,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4000년이나 쓰였던 상형문자를 풀 단 하나의 열쇠로 로제타스톤이 꼽혔다. 그러나 30년이 넘도록 수백 사람이 달라붙었어도 거기에 담긴 비밀은 풀리지 않았다 .로제타스톤이란 길이 1.25m,너비 0.7m,두께 0.28m인 검은 돌이다. 이 돌은 1799년 나폴레옹 원정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동쪽으로 60㎞ 떨어진 로제타 마을에서 요새를 쌓을 때  발견했다.

단단하고 결이 고운 검은 빛 현무암에는 반질반질한 쪽에 각기 다른 세 가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첫째 단 14행은 이집트 상형문자로, 둘째 단 32행은 민용문자로, 셋째 단 54행은 그리스어로써 있었다.

셋째 단의 그리스어를 번역해 보니 기원전 196년에 이집트 신관들이 프톨레미 왕의 공덕을 찬양한 글이었다. 로제타스톤은 영국군에게 빼앗긴 다른 유물들과 함께 대영박물관으로 보내졌지만, 석고로 뜬 사본은 파리로 갔다. 학자들이 연구해 보니 같은 내용을 세 가지 글자로 써놓은 것이었다. 학자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스어를 아는 이상 나머지 두 가지 문자를 푸는 일은 쉬울 것이니, 이집트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기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언어·역사·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두 이 일에 매달렸다. 그들은 이집트 상형문자가 뜻글자라고 못 박고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천재 언어학자 존 푸랑수아 샹폴리옹이 나타나기까지 어느 누구도 이것을 풀지 못했다.

 

 현대의 이집트 문자 해독

 

오늘날 학자들은 샹폴리옹이 밝힌 이론으로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다. 상형문자는 4,000년 동안 계속 변해 왔기 때문에 한 가지 비명을 해독했다고 해서 그 지식을 가지고 다른 것을 똑같이 풀어낼 수는 없지만, 샹폴리옹의 이론을 응용해 조금씩 조금씩 해독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이제는 한 비문을 읽을 때 첫 번째 줄은 오른쪽부터 읽고 두 번째 줄은 왼쪽부터 읽으며 세 번째 줄은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 한다는 것까지 알려져 있다.

오늘날 학자들은 샹폴리옹이 쓴 ‘이집트어 문법’을 밑거름으로 하여 옛글을 해석할 뿐 아니라 글을 쓸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집트 상형문자가 다 풀린 것은 아니다. 이집트학은 아직도 샹폴리옹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샹폴리옹은 이미 상형문자 가운데 어떤 것은 알파벳과 같은 소리(음가)를 나타내고 어떤 것은 부호 하나가 그대로 한 낱말이기도 하며 또 어떤 부호는 그 하나로 아주 복잡한 뜻(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 수수께끼들이 다 풀리려면 또 다른 샹폴리옹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위대한 두 제국

  피라미드를 본 관광객들은 아스완의 아부심벨 신전을 보았을 때 다시 한 번 놀란다.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320킬로미터 떨어진 돌산의 벽면을 깎아 만든 아부심멜 신전의 정면은 파라오의 모습을 한 4개의 거상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각 조상은 높이가 20미터, 얼굴의 귀에서 귀까지의 거리가 4미터, 입술의 폭이 1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이기 때문이다. 정면 조각 뒤로 돌산을 파서 만든 신전은 매년 춘분과 추분에 아침의 햇빛이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태양신과 파라오의 조상을 환하게 비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신전을 건설한 사람은 이집트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인 제19왕조의 제3대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이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는 이집트의 최절정기로 일명 ‘제국 시대’라고 불린다.

람세스 2세 시대의 이집트 및 오리엔트 지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던 이집트와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히타이트가 양분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대의 번영기를 누리던 이집트, 인류 역사상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강력한 히타이트. 두 제국 사이에 거대한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카데시 전투이다.

 




히타이트

 

   핫투사스 유적 19세기 중반까지 히타이트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국가였다. 히타이트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88년에서 1892년에 걸쳐서 독일의 고고학자 루우샨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단이 터어키의 동남단 진지르리에서 독특한 스타일의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발굴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이 바로 핫투사스라는 동서 1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의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다. 핫투사스에서 발견된 수많은 점토판이 해독되고서야 비로소 히타이트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원전 17세기 후반에 현 터키 지역을 통일한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의 수도를 키질강 만곡부의 중심 지점으로 옮기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핫투사스(Hattusas)라고 명명(命名)했다.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을 핫티 왕국이라고 불렀고 스스로를 핫티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지명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히타이트 왕국이라고 부른다.

히타이트는 점차로 세력을 키웠고, 기원전 1530년경에는 무르실리시 1세가 군사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진하여 함무라비 왕의 후손이 통치하고 있던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실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자 히타이트는 바빌로니아 통치를 단념하고 본국으로 철수하지만 왕은 암살된다.

그 후 1세기 반 동안 침체해 있던 히타이트는 기원전 15세기 후반부터 1세기 동안 인접 지역의 강국 미탄니와 격렬한 전투를 계속한다. 히타이트의 동쪽에 위치한 미탄니가 가장 번성할 때는 미탄니 군이 히타이트의 영토 내에 깊숙이 침입하여 간신히 수도 주변만 부지할 때도 있었다.

이때 나타난 영웅이 슛필룰리우마시 1세로 그는 수도에 거대한 성을 쌓아 본거지를 튼튼히 하고 후방 지역의 여러 소국과 동맹을 맺어 후방의 위협을 배제한 다음 미탄니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주효하여 미탄니의 수도는 함락되었고 그곳에 친(親) 히타이트 정권을 수립하여 동부의 방위를 철저히 하였다.

이때 히타이트와 맞설 수 있는 국가는 남부의 이집트뿐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세력권은 가나안까지 미치고 있었다.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정복하자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국경에 접하게 되었고 두 대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던 람세스 2세는 통치 초기에 광대한 건축 설계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북쪽의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타니스로부터 남쪽 누비아 지방의 아부심벨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방대한 도시들과 기념물들을 건설하여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세계 정세는 그를 추후에 이름이 붙는 ‘건축의 대왕’으로만 놔두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이집트와 국경을 마주보고 있는 히타이트로 하여금 어떠한 경우라도 이집트를 침략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이집트가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국경과 마주치고 강력한 제국 히타이트와 전쟁의 대 서사시이자 기록으로 남겨진 전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카데시 전투를 벌이기 위해 재위 5년 여름에 피람세스(세티 1세가 델타 동부에 세운 도시)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

 

카데시 전투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 대국에서 가장 많은 장병들이 참전한 대규모 전투로서 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집트는 전차병을 포함하여 2만 명의 장병을 동원했고 히타이트도 3만 5천 명이나 동원했다.

람세스 2세는 직접 5천 명의 장병으로 구성된 아몬 사단을 지휘하였고 역시 각각 5천 명으로 구성된 라, 프타, 세트로 이름 지은 세 개의 사단이 뒤따르도록 했다. 각 사단은 250명으로 구성된 20개의 중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람세스 2세오는 카데시 남쪽에 있는 산악 지대에서 멈추었다가 북쪽에 있는 샤브투나라는 도시로 진행했다. 그 도시의 남쪽에는 오론테스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있었다.

이때 두 명의 베두인이 람세스에게 다가와서 투항했다. 그들은 히타이트 군대가 북쪽의 아주 멀리 있는 알레포 부근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은 카데시를 통과한 상태였고 나머지 세 개의 사단은 매우 뒤 처져 있었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투항한 베두인의 정보로 보아 적은 매우 멀리 있었으므로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전투태세를 갖추지 않고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두인은 무왓탈리시가 보낸 첩자였다. 히타이트 군대는 실제로 람세스 2세와 지척인 카데시 북동쪽 성채 안에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우선 람세스 2세와 후발(後發) 사단을 분리시킬 계획으로 2,500대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전차병을 투입하여 아몬 사단을 뒤따르던 라 사단을 급습하였다. 레 사단이 히타이트 군의 공격으로 궤멸되자 무왓탈리시는 곧바로 람세스 2세가 지휘하는 아몬 사단을 공격했다. 이 급작스러운 공격으로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 역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신인 ‘아몬’을 의지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전투에 참가하여 직접 장병들을 격려했다. 다행하게도 지원군인 나아룬 군과 파 사단이 도착하여 꼼짝없이 사로잡히기 직전의 람세스 2세를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나아르 군은 가나안인 외인 부대 병사들로 구성된 특공대로, 이들의 도착은 람세스가 미리부터 계획해 둔 작전이었는데 절묘하게 그 시기가 맞아 들어간 것이다. 포위망에서 구출된 람세스 2세는 오히려 공격으로 나서 히타이트 전차병들을 카데시 남쪽으로 몰아낸다.

그러나 히타이트의 무왓탈리시는 자신의 군대가 쫓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만 8천 명에 달하는 주력 부대를 투입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무왓탈리시의 이 이상한 조치를 이미 이집트 군의 일부가 궤멸되었기 때문에 협약으로 끝나는 외교를 예상하고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즉 자신의 목적은 달성한데다가 이집트를 궤멸시킨다고 해서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왓탈리시는 양국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이집트를 점령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선 현 터키 지역에서 이집트까지를 일사불란하게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히타이트의 동쪽에는 아시리아가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아시리아가 공격해 오면 전선이 길어져 양 지역을 방어하기에 힘들므로 차라리 이집트와 협정을 맺어 아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최초의 국제 조약. 빈클러판에 써있다. 내용:“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하여 약탈하지 않는다”)여하튼 이 당시의 전투에 대해서는 수많은 자료가 있다. 우선 람세스 2세는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건축물을 건조했는데 그는 자신이 세운 건물 거의 모두, 즉 아비도스, 카르나크, 룩소르, 아부심멜, 라메세움 같은 여러 대신전과 누비아에 있는 두 개의 성소, 즉 아부심멜 대신전과 데르 대신전의 벽에 카데시 전투에 대해 기록했다. 이 벽화는 전투에 임하는 람세스 2세와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람세스의 공적과 전사들의 전투 장면으로 활기가 넘치는 구성은 고대의 상투적인 전쟁화(戰爭畵)와 비교해 볼 때 혁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부의 부조 벽화는 전투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하나 정교하게 기록하고 있고, 전투에 대한 독창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글도 첨가되어 있다. 내용은 당연하지만 람세스 2세가 이 전투에서 철저하게 적을 패배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국제적으로 과시했다는 것으로 추후에 어느 국가에서나 있었던 개선 장군의 기록과 같다.


Comment